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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지<13회>: 빨치산 45사단장 남원의 황의지

기사승인 2024.04.03  22: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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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을 여는 창/ 수필가 서호련

 

 

 

 

 

 

 

지하조직 투쟁전선의 동계면 당책 이상희와 접선(接線), 그리고 회문산 입산(入山)

 

김구 선생이 암살되자 그 좌절과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소련 기시요르크 45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 귀환령으로 조국 땅에 들어 온 지 80일이 채 안 되는 1949년 6월 28일, 드디어 나는 순창군 동계면 당책 이상희 동무와 접선이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30일, 내 인생에서 또 하나의 파란만장한 삶의 시작되었다. 드디어 입산(入山)을 결정한 것이다.

 

새삼 38선을 넘어와서 경찰들의 지독한 고문을 당한 일들이 밤낮없이 떠오르는 가운데 아내와 함께 매일 밭을 갈면서도 조국의 민주민족 통일조국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결의는 변함이 없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어느 날 뜻밖의 비보悲報가 들려왔다. 그것은 김구 선생의 암살 소식이었다.

백범 김구선생의 암살 비보, 그리고 미군정 포고

1949년 6월 26일, 우리민족의 큰 별인 김구 선생이 이승만 집단의 현역군인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경교장(京校場)에서 암살당한 것이다. 중국에서의 그의 삶은 조국의 광복을 위한 투쟁의 나날이었으며, 광복 후 귀국해서는 완전독립의 통일국가 건설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민족의 지도자였다. 나는 평소 그가 주도했던 중국의 임시정부를 찾아가려고, 1944년 12월 말 경부터 일제의 동맹국 독일이 패망한 1945년 5월 까지, 중국 남경에서 일본군 중지파견군 사병으로 있으면서 기회를 엿 보아 탈출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지만 항시 그를 사모해왔고 그의 높은 정신을 존경해 왔다. 김구는 상해임시정부의 주석으로서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실질적으로 주도하며 수많은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하와이 교포들이 말 한 것처럼 말과 행동이 달랐다.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실제 행동은 언제나 독선과 독재를 일삼았으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친일파와도 야합을 불사하는 사람이었다.

미군은 9월 8일 남한 땅에 진주하기 하루 전인 7일 일본과의 전쟁에서 얻어 낸 정치적 소득을 규정지은 ‘일반명령 1호’를 공표하며 미군정시대의 막을 열었다. 미군정 시대란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38선 이남 지역에 미군이 진주하여, 9월 8일부터 1958년 15일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기까지 3년 동안 실시한 군사 통치시기를 말한다. 미소간의 한반도 분단점령이 결정된 후 중장 J.R.하지의 38선 이남지역에 대한 군정을 포고한 데 이어, 12일 소장 A.V. 아놀드가 군정장관에 취임함으로서 미군정체제가 수립되었다. 국무성에서 파견된 정치고문 베닝 호프는 미국이 한국에 상륙한 지 1주일 후 “미군주둔의 목표는 소련의 지원을 받은 ‘급진적 혹은 공산주의적 집단’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을 방지하는데 두어야 한다”고 했으며, 이는 남한 주둔의 제 일차적 임무는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하는 것’ 이란 뜻이다. 미군정은 14일 총독부위 일본인 관리들을 행정고문으로 두고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이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또 18일에는 미군장교를 각 국장에 임명하고, 19일 ‘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 이라는 정식명칭으로 통치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지하조직을 통한 투쟁의 길 선택, 동계면 당책 이상희와 접선- 그리고 회문산 입산(入山)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파산지경에 이르고 있었던 친일파들은 새롭게 미군정을 맞이하여 과거의 지위를 되찾는데 성공하였다. 미군정은 대부분 친일 경력이 뚜렷한 인사들을 각종 고문과 군정관리 자격으로 채용함으로서 일제 잔재의 청산이라는 시대적 요청을 묵살 하고 시종일관 이들 친일파를 중심으로 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자신들의 인사정책으로 삼아나갔다. 한 마디로 미군정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또다시 일제 강점기로 역행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민당(韓國民主당)은 1945년 8.15 광복 후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보수 세력이 집결하여 창당한 한국의 정당으로서, 초기에는 중국의 임시정부를 지지하여 그 법통을 옹호하였으나, 점차 이승만의 ‘단정(單政)주장’과 임시정부 측의 ‘단정반대’로 정치적 의견과 노선이 갈리자 이승만의 단정론을 지지, 임시정부를 지지했던 태도를 바꾸었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늘 마음속에 이들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었으며, 기회가 되면 이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데 나설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하조직 투쟁전선과 접선을 하게 되었다. 이날이 바로 중국 상해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안두희로부터 저격당한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이래도 참고 저래도 참으며 묵묵히 살고 있는 서민들에게 악랄한 수법으로 우익이니 좌익이니 빨갱이니 적색분자니 하면서 자기들 기준에 따라 나누고 살인을 저지르고 재산을 빼앗는 친일주구배들과 미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들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두 입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이었다. 한마디라도 직언을 했다가는 죽음 아니면 병신이 될 뿐이니, 차라리 너나없이 투쟁전선에 가담한 것이다. 그 조직 중에는 마르크스 철학이나 헤겔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학습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중국이나 소련 등 공산주의 사회는 겪어보았어도, 학술적으로나 학문적으로는 그러한 사상이나 이념을 자세하게 교육받은 적도, 접해본 적도 없었다. (장군의 후예 2-207-226 P 참조)

 

 

남원뉴스 news@namwo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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