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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지<12회>: 징용 당한지 4년 4개월 만에 드디어 고향집에 돌아오다.

기사승인 2024.02.27  02: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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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을 여는 창/ 수필가 서호련

 

 

 

 

 

 

이범석 장군이 우리들 포로수용소를 방문한다? 이범석 장군이 누구인가. 그는 독립운동가로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중국으로 망명을 해서 운남(雲南)에 있는 중국육군강무학교(中國陸軍講武學) 기병과(騎兵)를 졸업하고 만주로 진출하였다.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김좌진 장군(1930-1989)의 중대장으로 참가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끈데 큰 공을 세웠다. 1922년 소련합동민족군 연해주지구 지휘관으로 소련혁명전에도 참가하였고, 1933년 중국 중앙훈련단 중대장을 지냈다. 1941년 한국광복군 참모장에 취임하고, 1945년 광복군 중장으로 8월 귀국하였다. 1946년 정부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에 기용되었다. 그야말로 한국독립운동의 상징적이 인물이 아닌가.

이범석 장군은 연단위에 올라가 자신은 일제 강점기에 눈보라치는 만주벌판에서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다년간 일제의 군경들과 싸웠다는 항일투쟁사를 힘차고 흥분된 어조로 토해내기 시작하였다. 중국과 만주, 소련벌판에서 징병으로, 그리고 포로로서 뜻하지 않게 이범석장군과 수 년 간을 대치했던 우리들로서는,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이범석 장군의 강연은 우리들의 귀환이 참으로 초라한 귀환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조국을 위해 용감하게 싸운 독립투사도 아닌, 일본군의 강제징병으로서 허송세월을 한 가엾은 희생물이었음을 자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숙소인 텐트 안으로 돌아오자 수용소장의 지시가 내려왔다. 각자 자기 고향에 서신을 보내어 이곳에 도착한 소식을 알리도록 하라는 것이다. 모두가 서둘러 부모 형제 처자에게 안부를 알리는 서신을 발송했다. 서신이 발송되자 일주일이 채 되지도 않아 수용소 안은 북적대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나의 편지를 받고 동생 의중이가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주월리 고향에서 부랴부랴 면회를 왔다. “형님, 이렇게 살아 돌아온 것이 꿈만 같소.”

드디어 귀 향 -그러나 세상은 친일주구(親日走狗)들 일색

수용소 생활도 어느덧 한 달 반이 넘어 3월 말경이 되었다. 각도 경찰청에서는 자신의 도에 해당하는 포로들을 인수해 가기 시작했다. 전라북도 포로들은 전주까지 가게 되었다. 경찰서에 도착하자 전라북도 도지사와 경찰청장, 각계 인사들이 나와서 환영을 해 주었다. 1949년 4월8일이 되자 각자의 출신지 경찰서에서 자기지역 출신을 인수하기 위해 수십 명의 경찰관들이 찾아와 북적대기 시작하였다. 나의 고향인 순창에서도 사찰계장 이하 4명의 경찰이 쓰리쿼터를 가지고 왔다. 순창관내의 포로는 모두 6명이였다. 새벽녘에 순창경찰서에 도착했다. 당시 경찰서장인 김정덕이라는 사람이 뛰어나오면서 큰소리로 수고했다며 인사를 하였다. “이제 각자는 이대로 일단 귀가해서 집안 식구들을 먼저 만나보고, 내일 오전까지는 다시 경찰서로 꼭 왔다 가시오. 다만 이번 길은 북한과 소련에 대한 말은 일체 해서는 아니 됩니다.” 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 특히 나에게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황의지 씨는 일단 집을 다녀오게 되면 수고를 좀 해 주여야겠소. 일주일 기한하고 우리와 같이 돌아다니면서 북한과 소련 실정을 보고 느낀 대로 선전해 주신다면 보수는 단단히 주겠소.” 나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실정이라 승낙을 하고는 귀가를 하게 되었다.

순창읍에서 우리 집까지는 16킬로미털 40리 거리였다. 버스 편으로 12킬로를 달려 동계면 면사무소 정류장에 내려서는 먼저 면사무소와 지서에 들려 돌아왔다는 인사를 했다. 4월초순의 봄 들녘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냉이, 씀바귀, 달래 등 봄나물들이 얼굴을 내밀고 나를 반겨주는 것이었다. 제비도 눈에 띄었다. 종달 이도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집을 떠나 군에 나갈 때는 1944년 12월 15일 22세 때였다. 오늘이 1949년 4월10일이니 4년 4개월만의 귀향이었다. 나의 아버님은 작년 5월 20일 돌아가시고, 어머님은 내가 인천수용소에 있을 때 동생이 올라와 면회를 하고 내려간 뒤 나의 생환소식을 듣고 애 태우시다가 지난 3월 9일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나는 포장이 쳐있는 부모님의 영전에 나아가 인사를 올렸다. 슬픔에 고개만 숙이고 눈물을 흘리고 서 있으니, 형님은 상복을 입고 영전 앞에서 한 없이 소리 내며 슬피 우시었다.

(황의지의 자서전 장군의 후예 2- 194-201 참조정리)

 

남원뉴스 news@namwonnews.com

<저작권자 © 남원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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