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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타령, 조상들은 여름을 어떻게 보냈을까

기사승인 2021.08.25  01:5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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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상준/ 남원학연구소장, 전)남원문화원장, 약사

 

 

 

 

냉방시설이 특별히 없었던 시대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여름을 보냈을까?

시원한 그늘이나 우물가, 하천, 산야를 찾아 자연친화적 여름을 보냈을 것이다. 선조들이 남겨 놓은 여름 타령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제 무더운 여름도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일기 시작하더니 가을의 문턱 입추(立秋)와 더위가 점차적으로 그친다는 처서(處暑)가 오고 이어 이슬이 백색으로 된다는 백로(白露)와 우리 민족의 대 명절 추석(秋夕)이 온다.

올해 여름은 무더위에 마스크까지 착용해야 하는 일상생활마저 바꾸어 놓은 여름이었다. 정말 짜증스럽고 코로나 19에 지쳐 어떻게 지냈는지 되돌아보기조차 싫은 삶이었다. 그러다 보니 피서는 낭만이요 여행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코로나가 없었던 시절 그래도 여름휴가를 즐겼고 피서라는 즐거움과 낭만이 있었다. 과거 한더위 프랑스 파리는 피서와 해외여행으로 도시기능이 마비되었다고 한다. 너 날 할 것 없이 피서를 떠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양 사람들은 이동민족이라서인지 동적(動的)피서를 많이 하고 정착민족인 우리 한국 사람들은 더위 속에 버티는 정적(靜的)피서를 많이 해왔다. 판소리 박타령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담양대 땀받이 죽삼(竹杉 대나무로 만든 윗도리에 입는 속옷)에 한산모시 고의적삼 전주 죽선(부채)은 왼손에 들려라. 굳이 죽선 부쳐 무삼 소용이냐 아흔 아홉 발 틈으로 새어드는 바람 아흔 아홉 뼈마디가 아리도록 시리는데.”

우리 민족의 더위타령(打令)이라 할 수 있다.

더위 속에 꼼짝 않고 들어앉아 부채질 하는 손의 움직임마저 거부하는 정적 피서가 아닐 수 없다. 기껏 이동해 보아야 그 이동반경은 이웃에 흐르는 개울물까지가 고작이다. 고려 때 청빈낙도(淸貧樂道)했던 시인 이인로(李仁老)의 탁족부(濯足賦)를 들어보자.

“나물먹고 배불러서 손으로 배를 문지르고 가냘픈 오사모(烏紗帽)젖혀 써 용죽장(龍竹杖)손에 짚고 돌 위에 앉아 두 다리 드러내어 발을 담근다.

한 움큼 물을 입에 머금고 주옥을 뿜어내니 불같은 더위가 도망치고 먼지 묻은 갓끈도 씻어내네. 휘파람 불며 돌아오니 시냇바람 설렁설렁 여덟 자 대자리에 조각만한 영목침 베고 꿈속에 흰 갈매기와 희롱하니 좁쌀이야 익거나 말거나.”

정적 피서는 보다 가혹한 더위를 생각 속에 설정하고 그와 비껴 청량감을 느끼는 상대성 피서를 유발시키기 마련이다. 고려 때 시승(詩僧) 원감(園監)의 고열음(苦熱吟)이 그렇다.

“큰 더위는 혹리(酷吏)의 혹심(酷心)도 재운다 했으니 더울수록 시원해지는 것을.”

혹리의 가렴주구에 상대시켜 더위를 잊고 있으니 눈물겹다. 우리속가(俗歌)의 더위타령도 도색(桃色)이 드러나는 상대성 피서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각시네여 내 더위 사시오. 이른 더위 늦더위 늙은 더위 오뉴월 복더위에 정든 님 만나 달 밝은 평상위에 칭칭 감겨 사랑씨름 하다가 오장이 번열하고 구슬땀 흘리면서 어이구 목말라 헐떡이던 그 더위와..동짓달 긴 긴 밤에 고운 님 더불어서 따스한 아랫목 뜨거운 이불 속에 두 몸이 한 몸 되니 수족이 저려 오르고 목구멍이 타 올 적에 웃목의 찬 숭늉을 들이켜던 그 더위를 사시오.”

이 외설적 표현의 피서에 시들어버리지 않을 더위가 없었겠다. 정적(靜的)피서는 이토록 차원 높은 심리피서를 한국인에게 발달시켰던 것이다. 한 여름 다갔으니 코로나도 물러나길!

 

남원뉴스 news@namwonnews.com

<저작권자 © 남원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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