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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농악의 산 증인, “모든 기예 후손에 전할 터”

기사승인 2019.09.25  12: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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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농악보존회 류명철 명인

 

 

 

 

 

 

 

 

 

 

 

“막중한 책임감이 듭니다. 하지만 남원농악의 위상을 드높이고, 돌아가신 아버님의 한을 풀어드린 것 같아 이제야 마음이 놓이기도 합니다.”

남원농악보존회 류명철(77·사진) 명인은 남원뉴스와의 통화에서 남원농악의 국가무형문화재 승격이 “모든 기능과 실력을 후세에 전승하라는 뜻으로 여겨져 어깨가 무겁다”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더불어 남원농악의 기초를 세우고 가진바 예능을 마음껏 발휘하지도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님의 한도 이제는 어느 정도 풀어드릴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남원농악을 키우고 발전시키는데 60여년 외길

국가무형문화재 승격 위해 모든 열정 쏟아부어

 

류명철 명인은 남원농악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온 장본인이다.

그는 1942년 남원시 금지면 상귀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류한준(1900-1952) 옹으로 1946년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전라북도 대표팀의 상쇠였다.

남원농악의 계보가 금지면 옹정리 독우물굿에서 이어지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이 마을 농악패의 상쇠였던 류한준 옹이 남원농악의 시조라고 볼 수 있다.

류한준 옹은 당시 송동면 세전리에 거주했던 전판이(1869-?)라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상쇠로부터 마을농악이 아닌 좀 더 발전된 전문적인 농악 예능을 전수받아 일종의 걸립농악 형태로 발전시켰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류명철 명인의 부친은 52세의 젊은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저희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셨어요. 이 때문에 일제시대 때는 가족들이 여기저기 숨어살았다고 해요. 기예가 뛰어나지만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여건이기도 했지만, 해방 후 한 2년간은 실력을 크게 발휘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6·25가 터져 활동을 못하다가 순창 월곡리에서 굿을 했는데, 당시 순사들에게 잡혀가 엄청 맞고 골병이 들어 돌아가셨어요.”

가진바 기예가 뛰어났지만 예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돌아가진 아버지의 한이 어린 나이의 아들에게 이어진 것은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

 

 

16세에 입문, 아버지 부쇠였던 강태문에게 농악 배워

 

류명철 명인은 부친이 돌아가시고 나서 부쇠였던 강태문이 상쇠를 맡게 되면서 1957년 정월부터 강태문 상쇠가 이끄는 '독우물 농악단'의 마당밟이에 농구로 참가하면서 농악에 입문했다.

어려서부터 농악을 듣고, 보고 자란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일수도 있지만 아버지 생각에 악을 품고 죽어라 노력했다고 한다.

농구를 통해 쇠잽이의 기능을 익힌 후에 상쇠로 처음 입문한 것은 18살 때인 1959년 남원춘향제의 농악경연대회에 출전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이때 그는 청소년들로 구성된 농악단을 구성해 대회 우승을 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강태문의 공연을 따라다니면서 기량을 익히고, ‘금산농악단 최상근 일행’의 포장걸립패 치배로 발탁돼 활동했다.

최상근 일행이 해체된 뒤에는 독우물농악단, 조산농악단, 천거리농악단 등에서 활동하던 남원 지역의 농악인들을 규합해 1970년대 초 ‘남원농악단’을 창단해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1970년대 후반 세상의 편견에 휘둘려 농악을 잠시 내려놓기도 했다.

 

남원농악 전승과 보급 위해 불철주야 노력

 

그가 다시 꽹과리를 잡은 것은 제자들의 설득과 남원농악의 전통이 끊어질지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농악을 다시 시작한 그는 다수의 공연과 발표회를 갖고, 대불대학교 전통연희학과, 남부대학교 한국음악학과, 세한대학교 전통연희학과 등에서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후진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97년 8월에는 금지면 상귀마을에서 ‘남원농악 판굿 발표회’를 성대하게 개최해 남원농악의 부활을 알렸다.

이러한 실력을 인정받아 그는 1998년 1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4호로 남원농악상쇠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1999년에는 남원시립농악단 창단에 참여해 부단장을 맡기도 했다. 그해 그는 남원농악 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남원시민의 장 문화장에 선정됐다.

 

 

남원농악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그의 부단한 노력이 뒷받침 됐기 때문이다.

그는 2003년 남원농악의 전 과정을 담은 동영상 자료를 CD로 제작하고, 2006년 남원농악의 가락과 고사 소리를 CD와 녹음 테입으로 제작해 배포했다.

2006년 10월에는 제자들과 함께 남원농악의 모든 장단을 정간보와 서양 악보로 기록한 ‘남원농악의 장단’이라는 단행본을 발간했다.

그는 1997년도와 2004년도에도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신청했었지만 뚜렷한 이유도 없이 고배를 마셨다고 말했다.

“중간에서 누가 농간을 부린 건지는 몰라도 서류가 제대로 올라가지도 못한 것 같더라고요. 자존심도 상하고 오기가 생기는 일이었죠.”

그는 자신의 능력을 실험하고 또 전국적으로 심판을 받아보자는 생각에 관련분야 명사들을 초청해 1년에 한 두 번씩은 꼭 공연을 개최하고, 다방면으로 남원농악 알리기에 경주했다고 한다.

남원시를 비롯해 주변의 노력도 큰 힘이 돼 최근에 남원농악은 국가지정문화재 승격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앞으로는 농악보급에 힘써 모든 능력과 역량을 후손에게 전하는데 매진하려고 합니다.”

그는 남원을 비롯해 전국 농악인들에게 자신의 기능을 한 점 숨김없이 전승해 남원농악이 다시 한번 꽃피도록 남은 인생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남원농악보존회는

비영리 농악 공연단체로 남원농악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1997년 11월 2일 창립됐다.

1999년 이후 남원 관내 23개 읍면동 농악단에 강사를 파견해 지도하고 해마다 흥부제 남원농악경연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남원농악 소속 단체회원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악기별 집중 전수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남원농악의 이론정립을 위한 학술 세미나, 강연, 자료집을 발간하고 있다.

1997년 10월 대전한밭축제 제5회 전국농악경연대회 종합우승(문화체육부장관상), 1999년 10월 제1회 김제지평선축제 전국농악경연대회 대상(국무총리상), 2002년 10월 2002 세계사물놀이겨루기한마당 최우수상(국무총리상), 2003년 10월 제3회 안성바우덕이축제 대상(문화관광부장관상), 2005년 5월 낙악읍성 전국농악경연대회 대상(문화관광부장관상)을 받았다.

현재 류명철 회장을 비롯해 부회장 3명, 전수조교 1명, 이수자 3명, 전수장학생 1명, 감사 2명 등 67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소속단체로는 남원지역 읍·면·동 농악단, 화목회 열린마당, 춘향풍물놀이패, 전주지회 '천둥소리', 순창지회 '어울마당' 등이 있다.

 

 

남원뉴스 news@namwonnews.com

<저작권자 © 남원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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