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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호남 땅에 발들이지 말라는 경고석 피바위 이야기

기사승인 2018.07.30  02:2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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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이후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는데 큰 힘이 되어온 돌이 있다.

지리산에서 이성계장군의 꿈을 받고 고려 말에 세상에 태어난 피바위가 그것이다.

고려 운명의 샘물 황산대첩 피바위의 비밀코드 이야기는 이렇다

 

고려 우왕6년(1380년)의 운봉 황산대첩!

그것은 운명을 다해가던 고려의 생명을 연장시킨 크게 이긴 전쟁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지만 한 장수의 신화적인 이야기는 넘쳐난 곳이다. 그곳은 지리산 운봉이다

 

이야기는 크고 기록은 적은 황산대첩은 당시부터 존재해 온 큰 유적을 하나 내었다. 그것은 피바위이고 조선개국이후 185년이 지난 훗날의 조선시대 유적은 황산대첩비이다.

황산대첩의 유적지 피바위가 가진 비밀코드는 문화적이다.

혹자는 분석의 이름을 들이대며 피바위의 실체를 부정하는 과학의 쾌감을 가지려 한다. 그러나 풍전등화와 같던 나라의 운명을 연명시킨 전투에서 그만한 이야기 몇 개는 차라리 우리에게 선한 문화적 에너지이다.

 

황산전투에 참가한 왜구들에게 그들의 연합군 대장 어린 장수 아지발도는 신화적 대상이었다. 온몸이 용 비늘로 철갑 되어 영생하는 존재라고 창조해 내었으니 그렇다.

그 대상을 활 한발로 전사시킨 이성계장군은 자신의 지지기반이 취약했던 삼남지방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데 이만한 기회와 소재가 없었을 것이다.

 

호남은 곡창지대다.

왜군의 식량보급지로 가장 적합한 지역이었으니 이곳을 드나드는 왜군들로 삼남 백성들의 삶은 피폐와 나라의 원망을 안은 세월을 대를 이어야 했다.

왜구의 잦은 출몰은 생사를 넘나드는 삶을 지치게 했으니 백성들은 구세를 원하는 민심이반을 가졌다.

누군가 호남을 나라의 기둥으로 생각 해주는 사람이 필요했고 기회가 왔다.

고려말 이성계 장군의 황산대첩이 그것이었다.

 

병력의 규모로 보아 열배나 많은 왜구를 격퇴하는 것은 불가능이었으니 왜구의 괴멸을 바라는 충청, 전라, 경상 삼남백성들의 지원과 협력은 서로가 바라는 선하고 공정한 거래 대상이었다.

삼남백성들의 민심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군사력에 앞서 백성들의 마음에 들어갈 신화적 문화력이 필수요건이었다.

고려군은 일당백이고 그 힘은 이 지역을 관장하는 지리산신의 계시에서 나온다. 그것의 이야기는 이성계장군이 지리산 신에게 기도하던 중 꿈에서 지리산 신에게서 받았던 초가집의 석까래 세 개의 이야기였다.

 

초가집은 백성을 말함이었다.

석까래 세 개는 충청, 경상, 전라 삼남백성의 상징이었다.

삼남지역 백성의 민심이 이성계장군에게 들고 있음이라는 지리산 신의 분신인 여원할매의 꿈해몽에 고려군의 사기는 열배로 커졌다.

 

고려군의 충천된 사기와 삼남백성들이 이성계 장군에게 내어준 민심은 씨줄과 날줄로 짜여 진 무적의 무기가 되어 황산전투는 대첩되었다.

이 일로 이성계장군의 입지는 커졌고 훗날 조선개국의 에너지가 되었다.

그 이야기 유적지는 운봉 태조봉 고남산에 있다.

왜구의 신은 하늘에서 바다의 풍파와 비를 관장하는 우룡이다

바다를 오가는데 안전하게 해달라며 모시는 우룡의 신을 앞세운 황산전투의 아지발토는 우룡의 상징이다

그래서 물과 연관된 부산에서 진주를 지나는 강줄기 주변으로 진격되어 온 것이다

 

이성계 고려군의 심리전은 그들의 신을 강변의 바위에 매장 화석시켜 영원한 사멸을 꾀함으로서 왜구들의 사기저하와 전력을 약화시킨 후 잔당을 괴멸시킨 것이다

따라서 황산의 람천 강변에 위치한 무거운 바위에 왜구의 신격인 아지발도의 영혼을 가두어 둠으로서 왜구의 잔악함에 떨던 백성들에게는 안위를 주고 왜구들에게는 황산 피바위가 영원한 두려움의 존재가 되게 하여 호남의 길목을 지켜내는 정신적 초병이 되게 한 것이다

아마도 승전 후 후에야 황산대첩비를 세우게 되었던 것도 왜구들의 우상 신이던 아지발토의 영혼이 가두어진 피바위를 부각시켜 왜구들의 준동을 막기 위한 심리전의 계략적 신화의 창조라는 생각이 앞선다.

 

고려 말에 이성계 장군의 꿈을 받고 세상에 태어난 피바위는 조선개국이후 정신적 성지이다.

왜구의 연합군 총 대장이었던 적장 아지발도는 용비늘로 무장된 영생하는 무적의 장수로 신격화된 어린장수다.

그 왜구 선봉장을 활 한발로 사살하여 그의 피가 바위로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인 후 피바위가 되었으니 그것의 속살은 강력한 경고의 멧세지다.

 

"앞으로는 영원히 이 땅에 발들이지 말라. 만약 이를 어기면 아지발도와 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라는 경고 말이다.

호남이 아니면 나라의 존립이 어렵다는 호국 의지의 씨앗은 고려 말 이곳 피바위에 들었으니 피바위는 왜구의 호남진출 길목에서 튼튼하고 성실한 초병이 되어 조선 내내 곡창지대를 탐내는 왜구를 물리치고 호남을 지켜내 온 바위 장수였다.

그 이야기를 받은 피바위는 문화공동체로 영생중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남원에서 조선의 흔적을 지워라는 일제의 만행은 황산대첩비의 파괴였고 그 속에든 피바위의 문화력도 함께 부서졌다.

지금 우리 앞에는 무엇을 어떻게가 놓인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문화적 자존감을 높여야하는 과제가 있다.

문화로 디자인 되어온 품격을 사업으로 망치는 우둔함의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한 답을 내는데 우리의 존재적 가치가 있어야 할 때다

문화로 풀면 품격이고 발굴로 풀면 실체 그것의 주체는 향토인이어야 한다.

 

남원뉴스 news@namwonnews.com

<저작권자 © 남원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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