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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 영정 토론회를 마치고, 강동원, 송화자 토론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

기사승인 2024.09.04  02: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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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오/ 남원역사연구회, 역사동화 작가

 

 

 

 

 

 

 

2020년 9월 60년 동안 춘향 사당을 차지하고 있던 김은호 작 춘향영정이 내려진 뒤 영정에 대한 시민 갈등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민들은 남원시와 의회에 끊임없이 공청회나 토론회, 학술세미나를 요구했지만 지난 4년간 한번도 이런 공론의 장이 없었다. 잡음이 좀 있었지만 시작 자체만으로도 이번 토론회는 큰 성과라고 본다.

작년 춘향제 때 새 영정을 제작해 사당에 올린 남원시와 문화원이 토론자로 나오지 않아 잘 차려진 밥상은 아니었지만 가장 큰 갈등의 당사자들이 80여 명의 청중들 앞에서 발표와 토론을 이어간 것은 매우 큰 성과다. 청중들 중에는 남원시민 뿐만 아니라 전북 도민, 역사계, 국악계, 학계에서 크게 활동하는 분들도 오셔서 토론회를 끝까지 지켜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해 강동원, 송화자 토론자들의 질문에 충분히 응답을 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지면을 통해 답변을 공개하고자 한다.

1. ‘최초 영정을 강신호가 그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주장에 대해

강동원 의원은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 간부 이현순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과 남원 권번 최봉선이 1929년에 사당을 짓기로 결의했기 때문에 1927년에 사망한 강신호가 최초 영정을 그렸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방송 인터뷰에서는 강신호가 절명(1927년)한 뒤 4년 뒤(1931년)에 그림이 그려졌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도 했다.(KBS뉴스, 2024.8.22.)

답변 : 사당 건립 운동은 강신호가 일본 동경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있던 시절에 이미 시작되었고 1927년에는 사당 건립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남원 권번이 전국 순회 공연을 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준비한 끝에 1931년에 사당을 짓고 영정을 모시고 춘향제향을 시작한 것이다. 강신호는 일본 유학 중에도 방학 때마다 고향 진주에 왔었다는 증언이 있고 1927년 여름에 진주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는 기사도 있다. 그러니 강동원 토론자의 추측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근거 자료>

1) 1927년 5월 20일 기사

중외일보는 남원 권번 기생들이 사당 건립 기금을 모으기 위해 전국 순회 공연을 했고 군산에 연주회를 하러 왔다고 보도하고 있다.

2) 사당 발의 시점은 1927년보다 훨씬 앞선다. 최봉선이 남원에서 공연을 한 첫 기록은 1920년 6월 9일 매일신문이며, 최봉선 관련 기사를 종합해 볼 때 사당을 짓기로 한 시점은 1920년대 중반으로 보인다.

3)1927년 7월

강신호 고향 진주서 개인전 기사

2. ‘최초 영정을 강신호가 그렸다 하더라고 미완성 작품이기 때문에 영정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강동원 토론자의 주장에 대해

답변: 최초 영정은 미완성 작품이 아니다. 강신호가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했지만 우형 임경수가 마무리를 했다. 우형이 그렸다는 것은 이당 김은호의 회고록 <서화백년>에 분명히 나온다.

김은호는 춘향사당에 있는 춘향 영정을 보고 ‘춘향의 상은 수년 전에 우형이라는 화가가 그렸다는데 페인트 날림 그림이었다.’고 쓰고 있다. 여기서 우형은 ‘우향 또는 우형’을 같이 쓰는 화가 임경수를 말한다. 또 김은호는 ‘내 그림을 위조해서 팔아먹던 우형이 그렸다’(1977년 중앙일보 김은호 인터뷰)고 말하기도 했다. ‘페인트’로 그렸다는 표현은 유화를 말하는 것이다.

임경수는 조선의 마지막 궁중 화가이며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의 형 지운영의 제자였고 역시 마지막 궁중 화가로 불리는 실력있는 동양화가다. 그러나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궁중을 나와 전국을 떠돌며 가난하게 살았다. 경상도 특히 진주 지역에서 많이 머물렀고 말년에는 마산의 어느 한약방에서 보냈다. 이것은 우형 임경수의 제자이며 경남 미술협회 이사였던 심재섭의 동생 심삼섭과 전화 인터뷰(김양오 실시)로 알게 된 사실이다. 심삼섭은 마산에서 화랑 표구사를 운영했고 우형의 그림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다. 그의 그림은 유명 박물관과 미술관에도 전시될 정도로 실력있는 작가지만 생계를 위해서 이당 김은호의 그림을 모작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은호는 우형과 춘향 영정을 저급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초 영정은 미완성 작품이 아니라 강신호와 임경수의 합작품으로 봐야 한다. 다만 강신호가 거의 완성한 단계에서 마무리만 했기에 최봉선은 진주 강씨 작품으로 말한 것이다. 치마 저고리에 서양화 기법인 음영기법이 정확히 보이기 때문에 강신호가 거의 다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최초 영정이 강신화와 임경수의 합작품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송화자 토론자의 주장에 대해

답변 : 최초 영정의 레이저 분석 결과(2021, 남원시)가 있다. 이 결과를 보면 그림의 거의 모든 부분에 유화 물감(징크 화이트)과 전통 안료가 섞여 있다. 서양화 재료와 동양화 재료가 섞여 있다는 것은 서양화가와 동양화가가 함께 그렸다는 명확한 증거로 과학이 증명하고 있다. 당시 서양화가 널리 보급되지 않아서 아무나 서양화를 그릴 수 없고 서양화로 그려진 밑그림에 전통 안료로 채색한다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을 미완성 작품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오히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동서양 합작 초상화, 영정이라는 의미를 부각시켜 스토링텔링의 자산으로 삼아야 한다.

4. ‘최초 영정에 낙관이 없다’는 지적에 대해

강동원 토론자는 김양오의 글 ‘당시 영정에는 낙관을 찍지 않았다고도 한다. 강신호가 완성하지 못했고 임경수가 완성해 낙관을 찍을 수 없었다’고 쓴 글에 대해 ‘상식적이지 못 한 주장을 아무런 검증 없이 사실과 다르게 주관적인 생각을 계속 반복하여 논쟁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명확한 근거를 대라’고 토론 자료집에 썼다.

답변 : 당시 영정에 낙관을 찍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는 말은 김양오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평생 마산에서 ‘화랑 표구사’를 운영하신 심삼섭 선생의 말이다. 그는 우형 임경수의 제자 심재섭 화가의 동생이며 마산의 대표적인 표구사를 평생 운영했기 때문에 임경수의 작품뿐만 아니라 수 많은 화가들의 작품을 만진 분이다. 심삼섭 선생은 당시에 초상화와 영정에는 낙관을 찍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분명히 말했다. 또한 김은호의 화첩 <이당 김은호>에는 수많은 초상화가 나오는데 이순신, 신사임당, 고종, 최제우 같은 여러 위인들의 초상화에도 대부분 다 낙관이 없다.

그런데 강신호, 임경수 두 사람이 같이 그린 정황이 분명하니 더더욱 낙관을 찍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을 상식적이지 못하고 논쟁을 반복한다고 몰아붙이는 듯한 글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강신호는 진주의 천재 화가였고 독립운동가 집안의 막내 아들이다. 그런 사람이 영정을 그렸다는 것은 영정의 가치와 춘향제의 의미가 더 커지는 것이다. 더불어 영정을 완성한 우형 임경수는 중국 상해에 가서 최초로 서양화를 배운 궁중 화가 지운영의 제자다. 그러니 동양화가지만 스승에게 유화를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유화로 그려진 영정에 과감하게 손을 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운영과 임경수는 또다른 의미가 있는 화가들이다. 둘 다 총독부가 주최하는 조선 전람회에 참여하지 않고 세상을 떠돌며 가난하게 살다 간 재야 예술가들이라는 점이다. 비록 생계를 위해 김은호 같은 유명한 사람의 그림을 모작 판매하며 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에 빌붙어 최고의 자리에 오른 김은호와는 비교도 안 되는 진짜 예술가 정신이 있던 사람이다.

4년 아니,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훨씬 오래 된 영정 논란을 토론회 한 번으로 결론 지을 수는 없다. 이번을 시작으로 좀 더 많은 연구와 토론의 장이 마련되기 바란다. 그러나 이번 토론회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현재 남원시가 새로 그려 올린 춘향 영정을 네 토론자 모두 거부한다는 의견 일치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1938년, 1961년 김은호 작 춘향상이 사당에 올라온 것은 일본 총독부와 박정희 정권이 한 짓이지 춘향제를 지내는 제관들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이 정확히 밝혀진 점이다. 그들이 영정을 바꾸지 않았으면 영정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고 춘향제 정신, 남원 정신은 훼손되지 않았을 것이다. 영정의 주인은 영정 주인공의 후손과 제관들이다. 감히 외부인이 건드릴 수 없는 영적인 물건이다. 그것을 우리 민족도 아닌 일제가 갈아치우고 내선일체로 활용한 증거 신문 자료가 다 나왔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이런 자료를 보고 분노하는 게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이번 정부 들어서 역사 왜곡, 친일 부활이 심각한 지경이다. 춘향영정도 단순히 춘향이 답네 안 답네, 이쁘네 안 이쁘네의 문제가 아니고 친일 문제와 연결이 되어 있음을 명확해 인지하고 올바른 해법을 찾아가야 한다.

그들이 저지른 일은 원위치 시켜놓고 춘향제에 대해 더욱 깊이 연구한 다음 연구 결과를 알리고 시민 투표든 어떤 형식으로든 전체 시민들의 의견을 모아서 매듭지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흔들리지 않고 100주년, 200주년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최초 최고의 축제로 이어질 것이다.

남원뉴스 news@namwonnews.com

<저작권자 © 남원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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