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Ⅳ. 永樂百問에 나타난,
三國(삼국)·魏(위)·晉(진)·南北朝(남북조)의 관상
이 시기에는 面相(면상)과 더불어 手相(수상)도 봤다. 위진 남북조시대에는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佛敎(불교)와 접목되었으며 仙家(선가)에서는 道敎(도교)쪽으로, 불가에서는 불가쪽으로 각각 연구되면서 새로운 相學(상학)의 용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삼국시대에는 위나라의 관상가 朱健平(주건평)과 管輅(관로)가 있었으며『三國志魏書(삼국지위서)』「方技傳(방기전)」에 보면 주건평은 특히 사람의 수명을 잘 보았으며 관로역시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관로의 자는 公明(공명)이다. 평원인이며 관로의 族兄(족형) 胡國(호국)은 惕懼(척구)에 살았는데 관로는 그를 따라가 두 명의 손님과 어울렸다. 손님이 떠나자 관로가 胡國에게 말하기를 저 두 사람은 천정과 입 귀 사이가 모두 凶(흉)한 기운이 있어 이변이 일어날 조짐이 있다. 아마 흉변을 당할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수레를 타고 가다 소가 뭔가에 놀라 수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관로가 말하기를 “내 이마(액각)위의 뼈는 뼈가 솟지 않았으며 다리는 千筋(천근)이 없고 등에는 三甲(삼갑)이 없으며 배에는 三壬(삼임)이 없는데 어찌 오래 살기를 바라겠는가? 나의 전후 상과 같은 사람 중에 죽은 자가 백명이 넘었으며 모두가 한치도 오차가 없었다” 라고 하였다. 그해 팔월 蔬部承(소부승)의 벼슬에 올랐고 그 이듬해 이월에 죽었으니 나이 48세에 죽고 말았다 전한다.
後漢末(후한말)부터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정치적 분열과 사회적 혼란이 정치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문화와 사상적으로도 다양한 변화가 초래된다. 兩漢(량한)을 계승하던 유가가 쇠퇴하고 도가가 발전하면서 魏晉玄學(위진현학)이 형성되는 등 다양한 사상들이 병존하고 흥망 하였다. 이것으로 인하여 인물에 대한 비평과 평가에 관련된 내용들이『世說新語(세설신어)』에 전한다.『世說新語』는 명사들의 일화집으로 당시 지식인과 귀족들의 생활 사상 풍조를 기록하고 있는데, 또한 상술가들에 대한 내용도 적지 않게 실려있다.
이 책의「容止篇(용지편)」에 당시 문학작품들을 품평할 때 중요한 표준이 되는 風骨(풍골)과 함께 인물의 風姿(풍자)·風儀(풍의)·風信(풍신) 등 인물의 외모를 나타내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潘陽仲(반양중)이 어린 王敦(왕돈)을 보고 “너의 눈이 벌과 같고 눈동자가 밖으로 들어 났으며 음성이 승냥이와 같지만 울림이 없다. 반듯이 사람을 잡아먹게 될 것이지만, 또한 사람(刺客)으로부터 잡아먹힘을 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왕돈은 秦(진)나라 원제 때 무창에서 반란을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였으나, 반란에 성공하지 못하고 병사했다. 명제 때 이르러 왕돈의 무덤을 파헤쳐서 衣冠(의관)을 불태우고 무릎을 꿀린 채 화형에 처해지는 剖棺斬屍(부관참시)를 당했다.
『세설신어』「언어용지」에 아래와 같은 인물평 들이 있다. 惠中散(혜중산)이 趙景禛(조경진)에게 “경의 눈동자는 흑백이 분명하여 백기의 풍모가 있으나 협소한 것이 한스럽다. 배령공이 왕안풍을 평하여 안광이 번쩍번쩍 빛나서 바위 아래 번개치는 것 같구나, 왕우군이 두홍치를 보고 탄복하여 말하기를 얼굴이 돼지비계를 뭉친 것처럼 매끄러우며 눈은 칠흑같이 점찍은 듯하니(點漆) 이것이 신선속의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상학에서는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고 있는데 눈동자의 흑백이 분명하다는 것은, 신기가 맑고 깨끗하면 재주와 지혜가 특출 하지만 눈이 협소하여 원대한 이상이 부족 됨을 안타까이 여긴 것이다. 눈이 細長(세장) 할수록 원대한 이상을 가지고 멀리 볼 수 있는 안목이 있기 때문이고, 눈이 칠흑같이 점찍은 듯하다는 것은 점칠로 精(정)의 기운이 뛰어난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인재의 선발기준에서도 상을 살필 때, 威(위)·厚(후)·淸(정)·古(고)·孤(고)·薄(박)·奇(기)·怪神(괴신)의 상태를 보았는데 암석이 푸르고 높게 깍아 지른 듯하다 라고 표현한 것을 淸古之相(청고지상)으로 인품이 맑고 고결 의연한 풍모를 묘사했으며, 이러한 인물평들이 이루어지면서 위진남북조 인들의 미학적 풍조를 흥기 시켰고 문학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기록을 보면 수상을 봤던 기록도 있다. 師圭(사규)라 불리는 관상가가 있었는데, 그는 관상과 더불어 手相도 잘 보았다고 전한다. 관상을 잘 보는 사규가 도간에게 말하기를 “군께서는 左手中指(좌수중지)에 수리(수직으로 난 문양)가 있어 公侯(공후)가 될 것입니다. 만약 이 문양이 위로 향한다면 매우 귀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陶侃(도간)이 침으로 찔러 그곳에 피를 내고는 벽에 뿌려 公字(공자)를 만들어 종이에 스며들게 하자 공자가 더욱 분명해졌다. 마침내 팔주의 도독이 될 수 있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병권을 장악했다. 은밀하게 帝位(제위)에 오르려는 야심을 감추고 있었으나 날개가 꺾인 조짐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뜻을 접었다.
위의 기록으로 보아 수상은 상학의 한 분야였음을 보여준다. 양무제 고조는 태어날 때부터 특이한 상을 지니고 있었는데 사타구니에 병골이 있고 머리쪽으로 융기하고 右手(우수)에 武字紋樣(무자문양)이 있었다. 따라서 다리에 나타난 특징과 손에 나타난 특징으로 상을 보는 중요한 요소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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