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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를 구한 ‘웅치 이치 전투’ -황진장군 왜군섬멸 (2회)

기사승인 2022.11.25  02:5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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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을 여는 창/ 수필가 서호련

 

 

 

 

 

 

 

<임진왜란 4대 대첩은 한산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에 이어 이치 전투이다. 선조수정신록은 그중에서 일본사람들은 웅치-이치 전투의 패배를 가장 뼈아프게 생각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 임금의 초라한 몽진 길에 의주목사 황진, 임금의 수라를 손수 지어 바치고.

1592년 6월 1일 소서행장 군대는 진격을 계속하여 대동강을 건너 사정이 더욱 급박하게 되자, 몽진 중에 있던 선조는 6월 10일 평양을 떠나 다시 의주로 떠났다. 왕의 일행은 1592년 6월 22일 의주에 도착하자마자 의주목사가 머무는 관사로 갔으나 누구하나 왕의 수라를 지어 바치는 자가 없었다. 그때 의주목사 황진과 판관 권탁(判官 權卓)이 몸소 관원 몇 사람을 데리고 와서 수라를 지어 올린바 있다. (장군의 후예1-118p)

이치전투의 승리는 왜란 초기 호남지방의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었다. 이치(梨峙)는 대둔산과 운장산사이의 고개이요, 웅치는 운장산과 마이산 사이의 고개를 말한다. 이치와 웅치는 경상도 방면에서 전라도, 충청도 쪽으로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고개이다. 대둔산과 마이산 두 산 사이에 운장산이란 산이 있는데 북쪽 대둔산과 운장산 사이에 이치고개가 있으며 남쪽 운장산과 마이산 사이에 웅치고개가 위치해 있다.

왜군들은 두 고개를 넘어 전주를 점령하고자 하였다. 왜군들은 조선군을 교란하기 위해 남원을 친다는 헛소문을 내고 1만 여명의 군대로 웅치를 공격하였다. 동복(화순의 옛 지명)의 현령 황진은 이에 남원으로 쳐들어오는 적군을 막기 위해 남원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웅치고개가 무너지면서 조선군은 전멸 당했으며 나머지 군대는 전주 근처 안덕원이라는 곳에서 일본군과 대치하였다. (안덕원은 소양면을 지나 전주로 들어오는 초입에 있는데 지금의 전주시 아중리와 금성동지역 안에 있던 마을이다.) 이 웅치 전투에서 조선관군의 용맹에 감명을 받은 왜군은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큰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조선국의 충성스러운 넋을 위로한다-弔朝鮮國忠肝義膽) 이라는 표목을 세워놓고 전주성으로 향했던 것이다.

동복에서 뒤늦게 도착한 황진은 웅치고개가 점령당한 것을 알고 안덕원으로 가서 왜군의 뒤를 공격하였다. 활로 왜장을 쏘아 왜군을 교란 시키고 달아나는 삼천여 왜군을 거의 전멸시켜 대승을 하고 권율장군이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 이치고개에 합류하였다.

이치전투는 황진장군의 활솜씨를 잘 드러내 보여준 전투였다. 황진장군은 백발백중의 실력으로 왜적들을 쏘아 왜군들의 시체가 점점 높이 쌓여 갔다. 웅치 이치 전투 승전의 결과로 조선은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사수하여 왜군이 이순신 장군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으며, 또한 전라도는 조선군의 식량과 무기를 공급하는 기지의 역할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런 연유로 우산 안방준은 임진 7년 동안의 전쟁에서, 수군으로는 충무공 이순신, 육군으로는 무민공 황진이 가장 눈부신 업적을 이루었다고 평가했다.

* 경기도 안성 죽산에서 왜군을 몰아낸 황진 장군-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오르다.

황진장군은 이후 경기도 안성시 죽산에 있는 4000명의 왜군을 1000명의 군사로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고 이후 죽산을 공격해 온 왜군도 물리쳤다. 그 후 황진 장군은 충청도 조방장직위에 오른 후 다음해인 1593년 2월 초 천여 명의 군병을 이끌고 죽산도호부(竹山都護府, 현 안성군 이죽면)의 죽주성(竹主城)에 머물고 있는 왜군 복도정측(福島正則)부대 1만 여명에 맞섰다.

장군의 전략전술은 참으로 신묘하여 완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죽산부와 음죽현 등 왜적에게 잃었던 땅을 회복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조방장 황진장군의 전공을 가상히 여겨 왜적이 죽산에서 퇴각한 날인 2월 29일 자로 황진을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에 제수하고 3월 1일 교지를 내렸다.

한편, 안성에 주둔하고 있던 황진은 왜적이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 재빠르게 왜적을 추격하면서 경상도로 내려갔다. 최경회는 의병장으로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되어 병사들을 이끌고 장수에서 진주성으로 출발하였다. 그런데 그의 소실 주논개는 부군을 돕기 위해 의병 몇 사람의 호위를 받아가며 뒤늦게 역시 진주로 향하다가 왜군들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지리산 빨치산대장 황의지의 자서전, ‘장군의 후예’ 박찬두편저 참고)

<다음호에 계속>

 

남원뉴스 news@namwonnews.com

<저작권자 © 남원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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