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13억 중국대륙을 흔든 혁명군가의 대부- 전라도 광주출신 정율성

기사승인 2022.08.12  04:47:59

공유
default_news_ad1

- 아침을 여는 창/ 수필가 서호련

 

 

 

 

 

 

8.17 한중수교 30주년에 ‘연안송(延安頌), 팔로군행진곡(중국인민해방군가), ‘조선인민군행진곡’등 불후의 혁명군가 작가 이며 동아시아의 혼이라 불리는 한국의 광주출신 정율성 조명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역사적인 평양 방문에 울려 퍼졌던 ‘조선의용군행진곡’. 중국 북경 천안문광장에서 펼쳐진 중국 항일 승전 70주년 열병식에서 첫 번째로 연주된 곡은 한국인 정율성 선생이 작곡한 <인민해방군가>, 1200명의 합창단이 부른 우렁찬 행진곡이었다. 그의 전기 영화가 한중수교 30주년(8월17일)을 맞는 올해 한중합작으로 제작되어 개봉 된다고 년 전에 kbs리포터가 전한바 있다.

두 나라는 왜 정율성에 주목할까? 정율성은 ‘한중 우호를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정율성은 광주 양림동에서 출생했다. 생가가 있는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엔 현재 ‘정율성 거리’가 만들어져 있고, 올해 중국 신화사 기자가 ‘정율성 거리’를 직접 찾아 방송도 했다. 2005년부터는 해마다 우리나라에서 '정율성국제음악제'가 열리고 있다. 양림동은 개화기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근대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 온 신문화도입의 창구로서 광주 3.1운동 일 번지 이기도하다. 양림동이라 하니 필자가 양림교회 밑 탱자나무울타리 집에서 살면서 그 먼 서중학교를 3년간 도보로 통학했던 기억이 새롭다.

1914년에 태어난 정율성은 전남 화순군 능주보통학교를 2학년까지 다녔고, 1928년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 이듬해 전주 신흥학교에 입학, 1933년 신흥학교를 중퇴하고 중국 난징으로 건너갔다. 그는 난징에서 조선혁명 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의열단에 가입했다. 시인 이육사도 이 간부학교 1기 입학생이다.

그의 가문은 아버지와 5남매 모두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항일가족이다. 그는 상하이에서 소련 레닌그라드음악원 출신의 크리노바 교수로부터 성악을 사사 받았으며 명문 루쉰(魯迅)예술학원 음악교수를 했다. 크리노바 교수는 율성에게 동방의 카루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 때 의열단장이자 조선혁명간부학교장이던 김원봉이 ‘음악으로 성공하라’는 뜻으로 본명 정부은(鄭富恩)에서 율성(律成)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주었다.

그렇게 중국 생활이 5년 정도 됐을 무렵 (1937년) 중·일 전쟁이 터졌다. 그는 난징을 떠나 중국 공산당의 혁명 기지였던 산시성(陝西省) 옌안(延安)으로 갔다. 1937년 4월 정율성(23세)이 작곡한 ‘연안송(延安頌)'은 1938년 봄 어느 날 저녁, 옌안 중앙 대례당에서 선 보였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주은래, 주덕 등 중국공산당 최고지도부가 참석한 대규모 음악회에서 정율성(鄭律成)은 여성가수 탕룽메이(唐榮枚)와 함께 무대에 올라 자신이 작곡한 옌안쑹(延安頌, 연안송)을 노래했다. 끓어 넘치는 정치적 격정을 담은 이 노래는 마오쩌둥과 공산당 간부들은 물론 온 중국인들을 울렸다.

공연 다음날 중공중앙선전부에서 이《연안송》악보를 가져갔고, 이 노래는 재빨리 전선과 후방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심지어는 국민당통치구와 동남아의 화교에게까지도 퍼졌다. 서정적이면서도 웅장한 느낌의 이 노래는 당시 중국 전역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우리의 ‘아리랑’처럼 널리 애창되어, 공연 이후 1945년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8년 동안 중국의 대표적인 항일 노래가 되었다.

그 2년 뒤인 1939년에 작곡한 ‘팔로군 행진곡’은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곡이다. 이 곡은 1988년에 덩샤오핑의 명령으로 ‘중국 인민해방군가’로 정식 지정되었고 중국에서는 애국가처럼 부르는 노래로서 중국 공식 행사 때 반드시 꼭 한번은 나온다는 곡이다.

그는 현재 중국현대음악의 3대 악성(樂聖)으로, 그리고 '동아시아의 혼'으로 추앙받고 있다. 특히 정율성은 중국 공산 혁명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인정받아 2009년 ‘신중국 창건 영웅 100인’에 뽑혔다. 그는 해방 후 일시 귀국하여 북한에서 활동하면서 ‘조선해방행진곡’, ‘조선인민행진곡’을 지었다.

고인은 현재 베이징 바바오산(八寶山) 혁명열사묘지에 잠들어 있고 그의 부인 딩쉐쑹(丁雪松,1918~2011)은 중국 신화통신 평양지국의 초대 지국장이자 중국 최초의 해외 주재 여성 대사다.

 

 

남원뉴스 news@namwonnews.com

<저작권자 © 남원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ad34
ad35
ad36
ad38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