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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과 책사가 풀어내는 관상의 지혜 -97-

기사승인 2021.02.25  22: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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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Ⅳ. 永樂百問에 나타난 物形論 (짐승의 모양으로 관상을 보는 법)

2. 虎狼이刑象(호랑이형상)

 

숲에서 나온 호랑이 형상(猛虎出林之相)

이마가 네모지고 입이 四字口(사자구)에 목소리가 웅장하고 입술이 붉고 齒牙(치아)는 銀色(은색)이다. 귀가 작고(귀가 작은 사람은 잔인하다) 눈이 크며, 눈빛(황금색이며 눈동자 가장자리에 검은테가 하나 더 있다)이 사람을 쏘아 보며 풍채가 당당하며 걸음걸이에 威儀(위의)가 있다. 男命(남명)은 文武(문무)를 겸하여 富貴(부귀) 할 수 있으나 女命(여명)은 결혼 후 대개 3년 이내에 喪夫相(상부상)이다. 男女(남녀)가 號眼(호안)을 가진 사람은 일찍 아들을 키우지 못하고 고독하다.

수나라황제 양견은 號眼으로 역사에 남는다. 그의 눈빛은 밖으로 쏘는 듯 위엄이 있으며 황금빛으로 매우 엄중했다. 그는 서위(西魏)의 홍농군 화음현에서 541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양충은 선비족의 군벌인 독고신의 부하였고, 본인은 한족이었다.

양견이 17세가 되던 557년, 독고신과 양충은 우문각의 쿠데타를 도와 북주(北周)를 성립시켰다. 그 공로로 양충은 수국공(隨國公)에 봉해졌고, 얼마 후 북주의 최고 실권자 중 하나로 떠올랐다. 양견도 아버지의 후광 덕분에 스물도 안 된 나이에 표기장군의 지위에 올랐다. 그리고 독고신의 딸인 독고가라(후일의 독고황후)와 혼인해 선비족과 한족 모두에서 든든한 지지기반을 쌓았다. 그리고 양견의 딸이 북주 황실에 시집가고, 그 남편(우문윤)이 황제로 즉위하면서(선제) 북주 왕조에서 양견의 입지는 더욱 굳어졌다. 577년에는 인맥과 혼맥이 아니라 스스로의 공으로 명성을 드날리기도 했다. 화북 지방을 반분하고 있던 북제(北齊)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것이다. 이로써 중국 북부는 북주가 통일했다. 이렇게 양견의 지위와 명망이 날로 대단해지자 자연히 경계도 받았다.

북주 명제는 아직 젊은 양견의 관상을 은밀히 보게 했는데, “장군감이며, 군주의 관상은 아니다”는 말을 듣고 안심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선제가 자신의 장인이 되는 양견을 의심하여 일부러 황후를 모욕하고는, “그가 들어올 때 분노하는 빛을 보이면 주살하라”고 주변에 명을 내려 두었으나 양견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공손한 태도를 보여서 그만두었다. 선제는 이처럼 화근을 제거할 기회를 잃더니, 황제 자리를 겨우 일곱 살인 아들 우문천에게 물려주고(정제) 상황이 되었다가 다시 1년 만에 병사함으로써 장인에게 나라를 선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꼴이 되었다.

양견은 선제의 유언을 위조하여 섭정을 맡았다. 그리고 지방에 분봉되어 있던 우문씨 다섯 왕의 도전을 무찌른 다음, 수왕(隨王)을 거쳐 581년에 정제의 양위를 받는다는 형식으로 수왕조를 세웠다

수문제는 즉위한 후 정제를 비롯한 우문씨 일족을 몰살시켰다. 그러나 왕권 확립을 위한 이 조치는 당장 강한 역풍을 맞았다. 당시 화북의 귀족들은 왕조와 국경을 초월해서 항구적인 지속성과 강한 결속력을 가진 문벌체계를 형성하고 있었고, 우문씨는 그 중에서도 가장 유력했던 무천진 군벌에 속했다(양씨 역시 그랬으며, 나중에 수나라를 대체하는 당나라의 이씨 역시 무천진이다). 그리고 일족 말살 과정에서 우문씨만이 아니라 혼맥으로 얽힌 다른 여러 귀족가문도 피해를 보았다. 이는 갓 수립된 수왕조에게 엄청난 원한과 반발이 겨누어지는 상황을 초래했다. 호랑이 상은 이처럼 추진력은 있으나 잔인한 면이 있다.

<다음호에 계속>

남원뉴스 news@namwonnews.com

<저작권자 © 남원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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